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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은 감각을 느끼는 뇌파의 차이’

(영성칼럼) 어느 평신도의 편지 고백(4)

기사입력 2019-11-22 오전 11:53:21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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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代案)은 대체재(代替財)가 아닌 보완재(補完財).

 

▲ (자료사진. /SNS 타임즈)

 

“(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우리가 지닌 맹점 중의 하나가 오직 믿음으로를 인용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일단 해 보고 안 되면 그때 가서 바꾸면 되지요 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이 아닌 교만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상당한 주의를 요구하는 당부이기도 하므로 조심을 해야 의심의 함정에 빠지지 않습니다.

 

속도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본질에 대한 접근의 방향이 더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아픔을 말하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아픔이 무엇인가요? 아픔은 삶()으로 겪는 느낌을 뇌파가 수용할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는 못해도 마음에 각인되는 증거의 부분 부분이 합쳐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주변을 돌아보면 조각 조각마다 분명한 이유가 따로 따로인 것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진실이지만 한편의 마음은 감춘채 한편의 마음만 주장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습니다. 보완재일 뿐인 대안을 완벽한 대체재로 믿고 사용하는 것 때문입니다.

 

비유가 좀 과할 수는 있겠으나 믿음의 통로에도 건달의 길과 깡패(양아치)의 길이 양존하고 있습니다. 의미가 대동소이할 것 같지만 분명히 다르고 원칙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지켜가는 것과, 되는대로 유익을 구하는 것의 차이를 지니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 잠시 의미를 두는 것은 소통의 마비현상인 뇌경색 현상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뇌경색이 일어나면 어떤 현상이 나타나던가요?

 

순간적으로 몸에 마비가 오고 방치하면 평생이 고통에 빠지게 됩니다. 믿음에 관한 정결함도 각각의 마음이 단단하기만 하면 절대로 시험에 빠지지 않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심령이 다른 것을 바라보면 뇌경색이 일어나므로 누구도 비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뇌경색이 일어나기 전에 각각이 어떤 삶에 속해 있는지를 자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나머지 삶이라도 그나마 온전히 버텨낼 수가 있기 때문이고 버티기 위해서는 다음의 내용이 중요해 집니다.

 

프라이드와 프라이버시.

 

( 16:5)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하리라.

 

우리의 삶이 피폐해지는 이유의 대부분이 이 부분을 따로 떼어 놓고 판단하고 싶은 쏠림으로 나타나는 현상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느 것도 버릴 수 없는 것이라고 보기에 둘 다 중요하다는 쪽입니다. 할 것과 지킬 것은 분명해야 한다는 전제하에 사적(史的) 자유를 철저하게 통제하지 못하면 명예는 자동으로 나락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욥을 사이에 두고 타락천사의 능력을 시험하셨던 것처럼 우리를 영화롭게 하신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에 부정할 명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찌 돌려도 우리의 일반적인 삶은 속수무책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영문도 모른 채 일을 겪다가 다시 일어섰던 욥의 경우가 그랬고 아프리카열병으로 인해 기르던 돼지를 살처분해야 하는 양돈 농가에는 아픈 현실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프리카열병으로 인해 삼겹살이 금겹살이 될 줄 알았지만, 소비자들의 불안으로 소비가 줄어 오히려 값이 내려가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의 판단이 참 편협하다는 것을 보며 입가에 씁소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편법과 불법을 바라보는 눈도 마찬가지입니다.

 

걸리지만 않으면 되고 터지지만 않으면 된다는 편법의 나중이 결국에는 불법이고 이에 대한 누적된 내용이 사고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을 두다 보면 결국은 손을 잡게 되므로 상처가 되는 전리품에 마음을 내주지 않아야 합니다.

 

나만 잘하고 잘난 것만 가지고는 주변의 상황이 정리가 되지 않는 것을 의미하고, 어찌 어찌하여 나는 안 다치고 벗어날 수가 있어도 주변이 무너져 버리면 그 다음의 수고는 미디안의 40년과 다름이 없이 몽땅 묶여버립니다.

 

도덕성은 어찌 보아도 진화(進化)의 대상이 아닙니다. 알고리즘으로 판단하여 해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냥 원칙만 지켜 나가면 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가나안으로 가는 발길이 더디었던 것입니다.

 

가나안을 정복하려면 삶의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 3:21) 그러나 네가 그 의인을 깨우쳐 범죄하게 하지 아니하므로 그가 범죄하지 아니하면 정녕 살리니 이는 깨우침을 받음이여 너도 네 영혼을 보전하리라.

 

백날을 배워도 머리에만 담고 있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머리는 굴리되 가슴에는 어리석음을 담지 않으면 갈 수가 없는 것이 파수꾼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적으로 판단하면 예물이든 섬김이든 유익의 계산이 맞지 않으므로 항상 손해를 보는 장사가 복음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에스겔에게 이런 말씀이 임합니다. 너는 이스라엘 족속의 죄를 짊어지되 내가 네게 명한 날수대로 왼쪽으로 누워 있고 그날이 다 차면 다시 오른쪽으로 누워 있으라. 도합 사백 사십 일이었고 이는 사백 사십 년의 세월이었습니다.

 

이 기간이 무슨 의미이었는지는 이미 짐작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어진 에스겔의 독백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다시 돌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주신 답이 더욱 어렵기 때문입니다.

 

( 4:14~15) 내가 말하되 아하 주 여호와여 나는 영혼을 더럽힌 일이 없었나이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스스로 죽은 것이나 짐승에게 찟긴 것을 먹지 아니하였고 가증한 고기를 입에 넣지 아니하였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쇠똥으로 인분을 대신하기를 허락하노니 너는 그것으로 떡을 구울지니라.

 

찌든 때는 그냥 벗겨지지 않습니다. 찬물이든 뜨거운 물이든 온몸을 담가서 불려야 벗겨지지요.

 

이스라엘의 지나온 형편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는 불순종의 기간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거기에 견주어 보면 우리의 형편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삶에 찌들어 잠들다 보면 게을러지고, 게을러 지면 씻어내는 것을 등한시하므로 냄새가 나는 것은 당연한 결과물입니다. 심령의 곳간은 자주 비워두면 사고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생쌀로 배를 채울 수는 없기에 불쏘시개의 대체재인 쇠똥으로 불을 지펴서라도 익혀 먹으라고 하신 것에 대하여 우리는 왜? 어째서? 라는 질문을 함께 가져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430여 년 동안 애굽에서 눈물에 젖은 부정한 빵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출애굽과 가나안은 불가분의 관계이지만 그 과정과 결과에는 우리를 향한 또 다른 메시지가 있음을 알아야 하겠기에 망설이는 베드로에게 주신 말씀처럼 너는 가서 잡아 먹어라고 하실 때 주저 주저가 없어야 하겠습니다.

 

멍에에 관한 부분은 각각이 부족함으로 인해 지기 쉬운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부패와 친구하지 마십시오. 부패도 잘 사용하면 도구가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있는 곳에 가보면 거룩은 없기 때문입니다.

 

당연한 것이지만 아직 거기까지는 가지 않으셨지요? 그렇다면 다시 다듬어 보십시오. 저는 이래도 저래도 아직 필터링의 능력이 부족해 자신이 없지만 저를 비롯하여 누구를 막론하고 가증한 진지(眞知)에서 벗어나 기성의 질서에서 자유로워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만 새롭게 변화되어 다시 예수를 바라볼 수 있는 피조물이라는 한계성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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